현대자동차그룹이 ‘순혈주의’를 버리고, 국적·성별·학력보다 ‘실력과 성과’를 중시하는 인사 혁신으로 체질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 체제 이후 그룹은 전통적인 내부 승진 중심 인사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IT업계·항공우주 전문가 등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며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Software Defined Vehicle) 시대로의 전환을 본격화하고 있다.
■ 순혈주의 탈피, 외부 인재 기용이 일상화
2019년 정의선 회장이 수석부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현대차와 기아의 대졸 공채가 폐지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당시 그는 “능력이 검증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며, 네이버·KT 등 ICT 기업 출신을 중심으로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했다.
2020년 회장 취임 후 이 기조는 더욱 강화됐다. 성과와 기술력을 중심으로 인사를 결정하는 ‘성과주의’ 원칙이 그룹 전반에 자리 잡았다.
대표 사례로는 항공우주 스타트업 CEO 출신인 벤 다이어천(Ben Diachun)을 그룹 CTO로 선임한 점이 꼽힌다. 그는 도심항공모빌리티(AAM) 기술 확장을 이끌며 현대차의 미래항공 전략에 기여했다. 또한, 30년간 NASA에서 근무한 신재원 고문을 직접 영입해 AAM 본부장으로 임명하는 등, 전통적인 자동차 인사 문화를 완전히 뒤집었다.
■ IT기업·해외 경영 전문가까지 핵심 요직에
현대차의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을 총괄하는 송창현 사장(AVP본부장) 역시 네이버 CTO 출신으로, 자율주행과 SDV 기술 전략을 이끌고 있다. 현대차가 2022년 그가 설립한 포티투닷(42dot)을 인수하면서, 소프트웨어 기반의 차량 개발 체계가 본격적으로 강화됐다.
또한, 호세 무뇨스 사장은 일본 닛산 출신으로 현대차 최초의 외국인 CEO다. 그는 글로벌 COO에서 대표이사로 승진하며, 해외 시장 성과를 기반으로 실적 중심의 인사 원칙을 증명했다.
미국 외교관 출신인 성 김 전 주한미국대사 역시 전략기획 담당 사장으로 합류하며, 글로벌 정책 대응력과 외교적 감각을 현대차의 경영전략에 접목했다.
내부에서도 외부 경험을 가진 인재가 고속 승진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삼성과 GE 출신인 장재훈 부회장은 제네시스 사업을 이끌며 실적을 인정받아, 2021년 사장에서 2024년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 “실력이 리더를 만든다”
정의선 회장은 인사 철학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국적, 성별, 학력, 연차와 관계없이 실력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 일하는 사람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
이 같은 원칙 아래, 현대차그룹은 하향식 조직에서 자율형·성과형 조직으로 진화하고 있다. 부서 간 경계를 허물고 프로젝트 중심의 협업 체계를 강화해, SDV·AAM·로보틱스 등 미래 전략사업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 SDV 시대, ‘기술기업형 자동차회사’로의 변신
현대차그룹이 인사 혁신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SDV는 차량의 기능과 성능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로 확장·개선할 수 있는 기술 구조를 말한다. 이 구조에선 기계적 설계보다 IT·클라우드·보안·데이터 처리 능력이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다.
따라서 자동차 제조사가 아닌 모빌리티 테크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선, 외부 기술 리더의 경험과 글로벌 시야가 필수적이라는 게 정 회장의 판단이다.
■ 성과 중심 문화가 조직 경쟁력으로
현대차그룹은 이제 내부 승진만으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순혈주의’를 버리고 외부의 새로운 피를 수혈한 결과, SDV·AAM·자율주행 등 미래차 핵심 분야의 경쟁력이 빠르게 강화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인사 혁신은 단순히 인재 구성이 아니라, 조직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실험”이라며 “출신보다 성과를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현대차의 위상은 한 단계 더 올라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