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미국 워싱턴DC에서 3,500억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둘러싼 마지막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22일(현지시간) 미 상무부 청사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을 만나 약 2시간 동안 세부 쟁점을 조율했다.

김 실장은 회동 직후 “남아 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일부 진전이 있었다”며 “협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잔여 쟁점은 한두 가지 수준으로 많지 않다”고 언급하면서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3,500억달러 패키지 핵심은 ‘구성 구조’와 ‘자금 투입 시기’

협상의 중심에는 한국의 대미 투자 패키지 구성 방식이 자리한다. 단순한 금액 합의가 아니라, 현금성 투자 비율·투자 기간·민관 분담 구조 등이 관건으로 꼽힌다. 미국은 공급망 안정과 자국 내 제조 기반 확대를 강조하는 반면, 한국은 재정 부담과 산업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입장이다.

이날 회동은 지난 16일 첫 회담 이후 엿새 만에 열린 2차 협상이다. 당시 양국은 4시간 넘게 회의를 이어가며 상당한 이견을 좁혔으나, 일부 핵심 쟁점을 남겨둔 채 재논의를 예고한 바 있다. 이번 방문은 사실상 최종 카드 제시 및 미국 측 반응 확인 절차로 해석된다.

▲APEC 전 타결 가능성…“정치적 계기 삼을 것”

김 실장은 “러트닉 장관과 추가 대면 회동은 어렵고, 필요하면 화상으로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는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언급하며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라고 표현해, APEC을 전후로 합의 발표 가능성을 시사했다.

외교가에서는 한미가 APEC 이전에 원칙 합의(Framework Agreement) 형태로 협상 결과를 발표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후 실무진이 세부 투자 항목과 일정, 평가 체계를 조율하는 방식이다.


▲산업계 파급 전망

이번 협상은 반도체·배터리·청정에너지 등 공급망 핵심 산업군의 협력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특히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첨단 패키징·AI 컴퓨팅 인프라 등 세액공제 연동 여부가 주목된다.

배터리 및 전기차 산업은 북미 원산지 요건 충족과 IRA 인센티브 적용 가능성이 핵심 변수다.

수소·청정에너지 프로젝트의 경우, 공동 투자·기술 이전 모델이 논의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과제: 현금 부담과 현지화 요구

재정 부담, 환율 리스크, 미국의 ‘현지 생산·고용’ 요구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투자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자금의 성격과 실행력”이라며 “APEC 전 정치적 타결이 이루어지더라도 구체적 실행 구조가 명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론

한미 협상이 ‘정치적 타결’과 ‘실질적 합의’의 경계선에 서 있다. 양국이 APEC을 계기로 투자·무역 협력의 새 프레임을 제시할 경우, 한국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 내 입지는 강화될 수 있다. 다만 현금성 부담과 산업 내 불균형이 커질 경우, ‘3,500억달러 패키지’가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