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통상 갈등과 지정학 리스크가 격화하는 가운데, 한·미·일 정·재계가 일본 도쿄에 모여 ‘민간 주도 경제안보 연대’에 시동을 걸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손정의(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을 비롯해 3국 주요 기업·정부 인사 50여 명이 참석한 ‘제3회 한미일 경제대화(TED)’에서다. 참석자들은 인공지능(AI)과 차세대 통신, 조선, 에너지, 공급망·물류 등 5개 분야에서 실행 가능한 공동 과제를 추렸다.

▲행사 개요와 의의

TED는 한·미·일의 정·재계 리더가 경제·안보 현안을 함께 논의하는 민관 합동 정책 세미나다. 글로벌 싱크탱크와 각국 대표 기업이 후원하는 이 포럼은, 정부 간 외교의 간극을 민간 네트워크와 기술 협력으로 메우겠다는 실사구시적 접근이 특징이다. 올해는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전략물자 통제로 복잡성이 커진 만큼, “기술 동맹이 곧 산업 생존”이라는 공감대가 유난히 짙었다.


▲ 누가, 무엇을 논의했나

반도체·통신(AI·6G) : 삼성전자, 퀄컴, NTT 등이 참여해 머신러닝·양자컴퓨팅 응용과 6G 상용화 로드맵을 협의했다. 통신 인프라에 AI를 심어 효율·보안·에너지 사용을 동시 개선하는 방안이 테이블에 올랐다.

에너지 전환 : SK, LG화학, 효성 등과 일본·미국 에너지 기업들이 분산형 전원, 재생에너지 최적화, 연료전지·전력망 디지털화를 논의했다. AI 기반 수요관리(DSM)와 저장(ESS) 고도화가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다.

조선·해양(MASGA 연계) : 상선·군함의 공동 건조, 정비(MRO) 네트워크, 해외 직접투자 촉진이 거론됐다. 조선업을 전략산업으로 재정렬해 공급망·안보를 함께 강화하자는 접근이다.

공급망·물류 : 핵심 광물 확보와 동맹국 간 물류 협업으로 리드타임·리스크를 동시에 낮추는 안이 논의됐다. ‘정치적 리스크를 분산하는 다축형 체인’이 목표다.

▲ 현장에서 나온 메시지의 함의

초거대 AI 시대 대비 : AI가 산업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만큼, 3국은 표준·특허·인력 교류에서 초기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기술-안보 결합형 협력 : 반도체·통신·조선은 각각의 산업을 넘어 안보 인프라와 직결된다. 관건은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뒷받침하는 투트랙 거버넌스 구축이다.

시장보다 ‘실행’ : 구호성 선언을 넘어 공동 실증, 조인트 벤처·컨소시엄, 상호 조달 등 계약·투자 단위의 실행 장치를 늘리자는 기류가 강했다.

▲ 한국 산업에 미칠 파장

반도체·6G 상용화 가속: 표준화·특허 연합이 공고해지면 국내 장비·소재·파운드리 생태계의 파급효과가 커진다.

모빌리티-통신 융합: 완성차-통신 간 협업이 자율주행·커넥티드카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차량용 반도체 내재화에도 속도를 낼 수 있다.

조선 재도약의 레버리지: 공동 건조·정비망은 고부가 선종과 함정·특수선에서 한국의 제작·공정 경쟁력을 부각시킨다.

친환경 에너지 가치사슬: 배터리·수소·연료전지로 이어지는 전주기 협업은 국내 기업의 글로벌 프로젝트 수주력과 CAPEX 효율을 높일 카드다.

정책 일관성의 중요성: 기업 간 합의가 현실이 되려면, 수출통제·세제·인허가·인력 비자 등 정부 지원 패키지가 일관되게 따라붙어야 한다.

▲ 남은 과제

표준·특허의 조기 정렬: 후발 주자의 표준 역습을 막으려면 3국 공동 IP 전략이 필수다.

공급망 ‘과집중’ 회피: 동맹 내 집중이 새 취약점이 되지 않도록 대체선·완충재고를 병행해야 한다.

정치 리스크 관리: 선거·정권 교체 시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초당적 산업합의가 필요하다.

한 줄 논평

정치가 갈라질수록, 경제는 더 촘촘히 연결돼야 버틴다. 도쿄에서 시작한 ‘기술-공급망 동맹’이 선언을 넘어 공동 투자·공동 생산·공동 표준으로 이어질 때, 위기는 오히려 한국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디딤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