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테크가 식품 산업의 신기술을 넘어, 기후위기와 식량 불안정, 건강 문제를 동시에 풀어낼 ‘정치적 핵심 과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 개혁정치의 상징으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서울에서 열린 국제 포럼에서 푸드테크의 전략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4~5일 서울 JW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월드푸드테크포럼 2025’에는 국내외 학계·산업·정책 분야 인사 약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월드푸드테크협의회, 대한상공회의소, 매일경제, 서울대가 공동 주최했으며, “모두를 위한 푸드테크(FoodTech for All)”를 화두로 푸드테크 생태계 구축 방향을 논의했다.
■ “농장에서 식탁까지, 식량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개막식 기조연설에 나선 슈뢰더 전 총리는 푸드테크를 단순한 식품 공정 혁신이 아니라 “농장에서 식탁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으로 규정했다.
그는 전통적인 농업·유통·가공·소비 구조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고 짚었다. 기후위기와 자원 고갈, 식량 가격 변동, 영양 불균형 같은 문제가 누적된 상황에서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다.
슈뢰더 전 총리에 따르면 푸드테크는 다음과 같은 기술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 인공지능(AI)·빅데이터를 활용한 수요·생산 예측
· 로봇과 자동화 설비를 통한 생산·가공 효율 극대화
· 기후에 덜 의존하는 스마트팜, 수직농장 등 차세대 농업
· 개인별 맞춤 영양과 식습관 관리를 지원하는 디지털 솔루션 및 3D 푸드 프린팅
· 식물성 단백질·배양육 등 대체 단백질 공급원
· 생산·가공·유통 전 단계의 데이터 추적·이력 관리 시스템
그는 이러한 기술들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하나의 식량 시스템’으로 통합될 때 진정한 혁신이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이 ‘푸드테크 산업 육성법’을 제정해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제도적 기반을 미리 갖춘 나라가 글로벌 선도국으로 치고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젊은 세대와 농식품 산업의 관계도 언급했다. 그는 많은 청년이 농업을 떠나는 현실 속에서, 푸드테크가 “식량·식품 분야를 21세기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바꾸어 젊은 인재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대체육·배양육 없이는 탄소 감축 목표 달성 어려워”
포럼 둘째 날에는 굿푸드인스티튜트(GFI)의 브루스 프리드리히 회장이 대체 단백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앞으로의 농업 혁신이 “고기를 어떻게 만드느냐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프리드리히 회장은 현재의 축산 방식이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사료 생산을 위한 대규모 경작지, 사료 운송, 가축 사육과 도축 전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감안하면, 고기 소비 증가 속도가 줄지 않는 한 각국이 약속한 넷제로(탄소중립) 목표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 축산을 그대로 둔 채 다른 산업만 친환경으로 바꾸는 방식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지적하며, 대체육·배양육이 가진 감축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대체 단백질이 본격적으로 확산될 경우, 수십억 톤 규모의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하며, 이는 운송 수단을 전기차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한국이 대체 단백질 분야에서 세계 상위권 특허 출원국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바이오테크·재생에너지·전기차에 집중 투자하던 국가들이 이제는 대체 단백질에도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역시 이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평가다.
■ HITI “한국 발효 기술에 주목”… 글로벌 투자 확대 시사
아랍에미리트(UAE) 기반 글로벌 투자사인 HITI(Healthy Innovations Technology Investment) 의 레이먼드 셰플러 CEO는 한국의 발효·바이오 기술을 푸드테크의 강점으로 꼽았다.
그는 인간의 노화 과정에서 줄어드는 효소 복합체를 보완하는 솔루션을 연구하는 한국 기업과 협업 중이라고 소개하며, “한국은 발효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분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매력도가 상당하다”고 평가했다.
HITI는 전 세계에서 건강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을 발굴·확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한국 푸드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 삼성·SKT “푸드테크의 핵심은 데이터·AI 연결”
푸드테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였던 IT·통신 기업들도 이번 포럼에 참여해 ‘푸드테크와 디지털 전환’ 을 주제로 비전을 제시했다.
삼성전자 – 요리 경험과 건강 데이터를 하나의 서비스로
양혜순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부사장은 MZ세대의 소비 패턴을 예로 들며, 레시피 검색 → 식재료 구매 → 조리 → 식후 건강 관리까지의 전 과정을 하나의 디지털 경험으로 묶는 전략을 소개했다.
삼성전자가 구상하는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 냉장고·앱에서 레시피를 추천받고
· 필요한 식자재를 즉시 온라인으로 주문하며
· 요리 과정은 인덕션 등 주방기기와 연동해 자동 설정하고
· 식사 후 섭취 칼로리와 영양 정보는 삼성헬스 앱과 연계해 관리하는 방식이다.
양 부사장은 “소비자가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순간부터, 실제로 요리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단계까지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통합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 SK텔레콤 – “푸드테크에 쓰일 양질의 데이터, 아직 턱없이 부족”
이종민 SK텔레콤 부사장은 AI와 데이터 관점에서 푸드테크의 과제를 짚었다. 그는 SK텔레콤이 이미 전국 수천 개 동물병원 데이터를 모아 AI 진단 서비스를 구현한 사례를 소개하며, “푸드테크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데이터 인프라가 필요하지만, 아직 식품·영양·조리 관련 데이터는 분절돼 있고 품질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푸드테크 기업과 AI 인프라 기업, 서비스 기업 간 데이터·기술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 회사의 기술만으로는 산업 전체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기 어렵다”고 말했다.
■ 스마트 양식·푸드로봇… 새로운 먹거리 산업 지형도 제시
→ 동원그룹, 강원도에 ‘스마트 연어 양식장’ 구축
유재형 동원그룹 KSF 대표는 스마트 양식 사업 계획을 공개했다.
2050년 세계 인구 증가에 따라 단백질 수요는 크게 늘어나지만, 기후변화와 환경 규제로 축산물 공급을 무한정 늘리기 어렵기 때문에 수산물, 그 중에서도 양식 어종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동원그룹은 수십 종의 수산물 가운데 양식 적합성, 수요 증가, 수입 대체 효과 등을 고려해 대서양 연어를 전략 품목으로 선택했다. 강원도 정선과 양양에 육상양식장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노르웨이 기업 ‘새먼에벌루션’과 협력해 정선의 맑은 물에서 치어를 키운 뒤, 양양의 바닷물 환경으로 옮겨 성어까지 키우는 한국형 연어 양식 모델을 추진할 계획이다.
■ 푸드로봇·협동로봇, ‘피지컬 AI’의 테스트베드로
푸드로봇 기업 뉴로메카의 박종훈 대표는 로봇기술과 푸드테크의 결합 가능성을 제시했다.
회사는 충돌을 최소화하고 사람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2세대 협동로봇을 개발 중이며, 이를 조리·서빙·간편식 제조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휴머노이드형 협동로봇도 구상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동화 로봇이 ‘피지컬 AI’가 필요로 하는 실제 환경 데이터를 수집·학습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식품 디지털 전환, 공장 안에서 끝나선 안 돼”
건강기능식품 기업 대상웰라이프의 서훈교 대표는 기존 식품업계의 디지털 전략을 비판적으로 돌아봤다.
그는 “그동안 식품기업의 디지털 전환은 주로 공장 스마트화나 내부 효율성 개선에 집중되어 있었고, 정작 소비자와 시장을 향한 디지털 전략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고 진단했다.
앞으로는 단순히 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개인별 건강 데이터를 바탕으로 운동·식단·섭취 제품을 통합 제안하는 솔루션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플랫폼 기업·헬스케어 업체와 협업을 추진 중이라고 소개했다.
■ “먹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 한식 문화 세계화를 위한 도전
세계적인 요리학교인 미국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의 양종집 교수는 ‘음식과 문화’를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한식을 단순한 레시피나 조리법이 아닌, 한국인의 역사·가치관·라이프스타일이 응축된 문화 코드로 설명했다.
양 교수는 뉴욕 CIA에서 한식 교육 커리큘럼을 본격적으로 개설할 계획을 밝히며, “전 세계적으로 K-푸드 인기는 높아졌지만, 한식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체계적인 교육은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번 시도가 한식을 단순 유행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게 만드는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
■ “연구실의 96%와 산업계의 마지막 4%를 잇는 다리, 산학 협력”
로봇공학 전문가 데니스 홍 미국 UCLA 교수는 푸드테크 발전을 위한 산학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로봇 기술 개발의 실제 과정을 예로 들며,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기술을 완성하더라도 마지막 상용화 4%가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감당하는 기업들의 도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도전적 연구를 강점으로 가진 학계와, 이를 실제 시장으로 연결하는 산업계가 긴밀히 협력해야 푸드테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종민 SK텔레콤 부사장도 “반도체나 ICT 분야와 비교하면 푸드테크는 아직 민간 투자와 정책 지원이 부족한 편”이라며,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과 민간 자본 유입, 학계의 연구 역량이 함께 맞물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 푸드테크, 먹거리 산업을 넘어 ‘미래 국가 전략’으로
이틀간의 포럼을 통해 드러난 메시지는 분명하다. 푸드테크는 더 이상
· 새로운 가전제품,
· 식품 브랜드의 마케팅 도구,
· 일부 스타트업의 실험적 분야에 머무르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후위기 대응, 식량 안보, 국민 건강, 농어촌 인구 문제, 신산업 육성까지 동시에 걸린 국가 전략 과제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슈뢰더 전 총리가 언급했듯, 푸드테크를 어떻게 설계하고 누구와 함께 키워 나가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사회·경제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이번 서울 포럼은 그 전환점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할지, 국내외 인사들이 함께 고민한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