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제품 자전거 12대에서 출발한 기아가 연 매출 100조 원 규모의 글로벌 완성차 기업으로 성장한 지 80년.
기아가 창립 80주년을 맞아 과거의 생존기를 넘어, ‘위대한 100년’을 향한 미래 모빌리티 기업 청사진을 공식적으로 내놓았다.

■ “굴곡 많은 80년, 이제는 100년을 향한 여정”

5일 경기 용인 비전스퀘어에서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 행사에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비롯해 이학영 국회 부의장, 강기정 광주시장, 송호성 기아 사장 등 전·현직 임직원 4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의선 회장은 이날 축사에서 기아의 역사를 “한 편의 서사와 같은 여정”으로 표현하며,
이제는 80년 동안 쌓아온 헤리티지를 바탕으로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행사 후 취재진과 만나 기아의 정체성을 한 단어로 요약해달라는 질문에,
과거 여러 차례의 위기와 산업 환경 변화를 언급하며 ‘도전’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창업주 김철호와 현대차그룹을 키운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여준 도전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 미래차 콘셉트 ‘비전 메타투리스모’ 공개…“이동에서 휴식·소통으로”

기아는 이날 미래 콘셉트카 ‘비전 메타투리스모(Vision Metatourismo)’를 최초 공개하며 향후 전략의 방향성을 드러냈다.
이 콘셉트카는 역동적인 주행 성능에 넉넉한 실내 공간을 결합해, 기존의 ‘이동 수단’을 휴식·소통·경험의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증강현실(AR) 헤드업 디스플레이 기술을 적용해, 운전자가 별도 기기를 착용하지 않고도 차량에 탑재된 스마트 글라스를 통해 가상 그래픽을 실제 도로 위에 겹쳐 보는 방식을 구현했다. 단순한 내연기관 차량을 넘어서, 소프트웨어와 디지털 경험이 중심이 되는 SDV(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신호로 풀이된다.


■ “자율주행, 속도보다 안전”…테슬라·中 업체와의 차별점

정 회장은 자율주행 경쟁 구도에 대한 질문도 받았다. 그는 미국 테슬라와 중국 업체들이 기술 상용화 속도 면에서는 앞서 있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격차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완성도와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겠다는 의미다.
단기적인 속도 경쟁이나 화제성보다, 실제 도로 환경에서 ‘사고를 줄이는 기술’에 방점을 찍겠다는 기조가 확인된 셈이다.

■ “정제되지 않은 다이아몬드”…기아만의 브랜드 색

현대자동차와 차별되는 기아의 고유성에 대한 질문에, 정 회장은 기아를 “정제되지 않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

날카롭고 강한 개성이 살아 있는 브랜드이지만, 이를 잘 다듬으면 훨씬 강렬한 존재감을 갖는 보석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최근 기아가 디자인과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전면에 내세워 이미지 변신을 추진하고 있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히 ‘현대차의 또 다른 브랜드’가 아니라, 젊고 과감한 디자인·라이프스타일 이미지를 가진 별도의 축으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 두 번의 부도·통폐합·IMF…위기마다 더 크게 성장

기아의 80년은 영광만큼이나 위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산 자전거가 한 대도 없던 시절, 창업주 김철호는
“자전거를 완성하면 자동차를, 자동차를 완성하면 비행기를 만들겠다”며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내놓았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사업 악화로 첫 부도를 겪었다.

1980년대에는 정부의 자동차 산업 통폐합 정책으로 승용차 사업에서 강제 철수하는 아픔도 있었다.

이후 외환위기(IMF) 시기에는 은행·법정관리 체제, 제3자 인수 등 거친 구조조정을 거치며 사실상 생존을 놓고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기아는 위기 와중에도 공장 신·증설과 신차 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오늘날 글로벌 완성차 톱5 수준의 위상을 갖추게 됐다.
정 회장이 ‘창업정신’과 ‘도전 DNA’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배경에는, 위기를 성장의 계단으로 바꿔 온 과거 경험을 미래 경쟁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 정의선 체제 이후 본격 성장…디자인·글로벌 전략 결합

기아의 체질 개선과 본격적인 도약은 정의선 체제에서 더욱 속도가 붙었다.

2004년, 당시 정의선 부사장이 기아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며
그룹 내에서 기아의 역할이 재정의됐다.

2006년에는 독일 출신 세계적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이른바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했다.
기아의 차량 디자인이 글로벌 시장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다.

2018년에는 미주·유럽 등 권역 본부 체제를 도입하며 글로벌에서 직접 전략을 짜고 실행하는 구조를 강화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아는 단순한 ‘국내 완성차 브랜드’에서 벗어나,
전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높이는 글로벌 모빌리티 플레이어로 자리잡았다.

■ “다음 100년, 미래 모빌리티판 주도하겠다”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자율주행, 전동화, 서비스형 모빌리티(MaaS) 등 자동차 산업의 중심축은 이미 ‘탈 내연기관’ 시대로 이동했다.
기아는 창립 80주년을 맞아 “위기 때마다 더 강해진 회사”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제는 판세에 휘둘리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판도를 설계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정의선 회장이 말한 “100년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
자전거 공장에서 출발한 한 기업의 생존기를 넘어,
한국 모빌리티 산업 전체의 다음 100년을 여는 시험대가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