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대전환을 국가 전략으로 삼은 가운데, 전력 수급을 둘러싼 해법이 다시 원전으로 수렴하고 있다. 이기복 한국원자력학회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주파수와 공급이 24시간 안정돼야 하는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는 기존 센터 대비 전력 수요가 ‘자릿수’ 단위로 커진다”며 “탄소 없이 지속 공급 가능한 기저전원으로 현 시점에서 현실적인 대안은 원전”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수”라며 “변동성과 간헐성을 원전·양수·ESS 등으로 보완하는 ‘공존 시나리오’가 합리적”이라고 못 박았다.

핵심은 전력의 ‘품질’과 ‘단가’다. AI를 뒷받침하려면 주파수 편차가 극히 좁은 상태로 대량의 전력을 24시간 공급해야 한다. 태양광·풍력 중심의 체계만으로는 저장·송배전 인프라 비용이 커지고, 날씨에 따른 변동성 탓에 품질 관리가 어렵다. 이 회장은 “재생과 원전의 이분법을 접고, 지역별·수요별로 최적 믹스를 설계해야 전기요금과 전력안정, 탄소감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정책 지형의 변화도 변수다. 새 정부가 기후·에너지 조직을 개편하면서 원전 정책의 컨트롤타워가 다원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회장은 “연구개발·산업·환경 등 부처가 나뉘면 조정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신규 원전·SMR 부지 선정, 인허가·공론화, 금융·수출 패키지까지 ‘한 목소리’로 밀어붙일 지휘체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여야 합의로 확정된 전력수급 기본계획(11차 전기본)의 일정 준수와 더불어, 차기 전기본에선 데이터센터 수요를 반영한 추가 기저전원 확충 로드맵을 명확히 하라고 주문했다.

국제 이슈에 대해선 실용주의를 택했다. 한·미 원자력 협력에서 불거진 통제·규정 문제를 두고 그는 “지재권 공방으로만 볼 사안이 아니다”라며 “수출 통제와 시장 접근성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 미국 내 프로젝트·제3국 공동 진출로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했다. 특히 미국이 원전 확대를 천명한 만큼 “공급망·시공 역량을 갖춘 한국의 참여 여지는 오히려 커졌다”는 분석이다.

재생에너지를 둘러싼 오해도 짚었다. “재생 확대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다만 변동성을 감당하려면 대규모 저장, 백업전원, 계통 보강이 필요하다. 비용·입지·안보(설비 공급망)까지 고려하면, 원전과 재생의 역할 분담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학회 차원에서도 전기·신재생 분야 단체와 공동 포럼을 열며 통합 해법을 모색 중이라고 소개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AI-전력-산업경쟁력’의 연쇄를 동일 선상에 놓는다. 데이터센터 집적과 반도체·클라우드·서비스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에서 전력의 가격과 품질은 결정적 변수다. “전기요금이 소폭만 올라가도 대형 제조·서비스 기업의 비용은 수천억 원 단위로 튄다. 국제 경쟁이 격화되는 시기에 전력 믹스를 현실적으로 설계하지 못하면, AI 산업 전략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다.

정책 과제는 분명하다.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반영한 전원 믹스 재설계 △신규 원전·SMR의 중장기 로드맵과 사회적 의사결정 구조 확립 △재생·저장·계통 투자의 ‘총비용’ 공개와 단계적 최적화 △원전 수출·금융·표준 패키지의 외교적 확장 △소부장·안전·운영 인력 생태계의 연속성 유지다. AI 강국을 향한 ‘전력 전략’이 공론의 장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질 때, 원전과 재생의 공존은 구호를 넘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