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정치는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요약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정치 지형을 설명하는 데 이 구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 오늘날 세계를 가르는 진짜 단층선은 민족주의 대 세계주의다. 경제와 생태, 기술은 이미 글로벌 차원에서 얽혀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국경의 테두리에 갇혀 있다. 그 불일치는 세계 곳곳에서 분열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민족주의의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애국심은 공동체를 묶는 결속력으로 작용했고, 역사 속 수많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위협은 국경선을 넘어 다가온다. 기후 위기,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일자리 대체, 팬데믹, 그리고 기후·분쟁 난민의 대규모 이동—이 거대한 도전에 맞서기에는 개별 국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국기와 영토를 넘어서는 새로운 협력의 틀, ‘세계적 규칙’을 세우는 작업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특히 기후 위기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 국경 안에서 “우리만 잘살면 된다”는 태도는 불가능하다. 대기와 바다는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며, 탄소 배출의 부담은 가난한 나라와 취약 계층이 먼저 떠안는다. 기술 발전도 마찬가지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은 미국이나 유럽의 저숙련 노동자뿐 아니라 방글라데시 봉제공장 노동자까지 위협한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는 ‘기본소득’조차 대부분이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다. 하라리가 비판했듯, “구글과 애플의 세금을 거둬 방글라데시 실업자를 먹여 살리겠다”는 구상은 공허한 이상일 뿐이다.

세계주의는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층적 충성을 요구한다. 가족과 지역, 국가에 대한 충성 위에,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을 얇지만 단단히 얹자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실용적 선택이다. 데이터의 강과 기후의 파도, 바이러스의 바람은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적 거버넌스는 덴마크식 민주주의처럼 매끈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대 제국에 가까운 불완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불완전한 협력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우리가 마주한 과제는 단순한 이상 논쟁이 아니라 실존적 위험의 관리다. 핵무기가 그러했듯, 새로운 위험을 제어하는 규칙을 세우지 못한다면 한 번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의 정치적 분열은 단순히 ‘보수냐 진보냐’의 싸움이 아니다. 국경 안에만 시선을 고정한 민족주의는 당장의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인류가 맞닥뜨린 도전의 크기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1세기의 과제는 지역의 뿌리를 지키면서 세계적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국기를 향한 충성과 지구를 향한 책임은 모순되지 않는다. 두 깃발을 함께 들 수 있을 때, 인류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