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장기 연체채권을 정리하기 위해 추진 중인 ‘배드뱅크’ 설립이 출발선에서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설립 자금 중 절반인 4,000억 원을 금융권이 분담해야 하지만, 업권별 이해가 엇갈리면서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분담 비율 없는 ‘자율 구조’의 한계
정부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에 특수목적법인(SPC) 형태로 배드뱅크를 세우고, 7년 이상 연체된 소액 무담보 채권(5천만 원 이하)을 평균 5% 가격으로 매입할 계획이다. 총 8천억 원 규모의 재원 중 절반은 추경으로 충당했지만, 나머지 절반을 민간 금융권이 출연하도록 한 것이 문제다.
가장 큰 쟁점은 ‘누가 더 많이 부담할 것인가’다. 금융당국은 업권 간 자율 합의를 주문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는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다.
▲업권별 이해 충돌
·은행권
수조 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은행권이 가장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미 교육세, ELS 과징금, 상생 비용 등 다양한 출혈을 감당 중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카드사
카드 업계는 연체 채권 규모가 크지만, 최근 가맹점 수수료 인하와 순이익 20% 감소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추가 부담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부업체와 저축은행
채권 규모는 크지만 매입가율이 낮아 참여 메리트가 적다는 불만이 나온다. 특히 저축은행은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 정리에 집중해야 해 여력이 없다고 호소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업권이 “우리가 더 낼 수 없다”는 태도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가이드라인 필요성 대두
금융권 내부에서는 차라리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자율 합의는 명분상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 ‘치킨게임’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향후 전망
정부는 9월 안으로 배드뱅크를 출범시킨다는 계획이지만, 업권 간 합의가 지연될 경우 일정 차질은 불가피하다. 다만 금융당국이 정책 인센티브를 카드로 꺼내 들면서 대부업계 등이 참여 쪽으로 기울고 있어, 막판 조율에 속도가 붙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배드뱅크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누가 더 부담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계산을 넘어, 금융권 전체가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