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민 워드프로세서’로 불리며 대한민국 직장인의 필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던 한글과컴퓨터(한컴)가 깊은 성장통을 겪고 있다. 1990년대 독점적인 시장 지위와 ‘애국 마케팅’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었던 모습은 희미해졌고, 최근에는 사상 첫 파업 움직임까지 더해지며 위기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90년대 국민 소프트웨어의 상징
한컴은 이찬진 전 대표가 이끌던 시절, ‘아래아한글’로 국내 워드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당시 90%가 넘는 점유율을 바탕으로 ‘국민 소프트웨어’라는 별칭을 얻었고, 사용자의 지지를 기반으로 ‘국민 지분 운동’까지 벌였다. ‘8.15 할인’과 같은 마케팅 전략은 애국심을 자극해 구매를 유도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글로벌 경쟁력 약화와 주가 추락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MS 오피스 등 글로벌 표준 문서 도구가 일상화되면서, HWP 파일을 사용하기 위해선 별도의 뷰어나 변환이 필요하다는 불편함이 커졌다. 해외 기업·기관과의 협업이 불편하다는 지적이 계속됐고, 시장 점유율은 하락했다. 현재 업계에서는 국내 점유율을 30% 수준으로 추산하지만, 해외 시장 점유율은 1%에도 못 미친다는 평가다.
한컴의 주가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한때 30만원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최근 3만원대 초반에서 거래되고 있다. IT 섹터의 전반적 반등에도 불구하고, 한컴의 거래량과 투자자 관심은 예전만 못하다.
노사 갈등, 창사 이래 첫 파업 예고
최근에는 내부 갈등도 표면화됐다. 한컴 노동조합이 사상 처음으로 파업을 예고하며 사측의 ‘불통 경영’과 임금 협상 결렬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업계는 이번 갈등이 실제 파업으로 이어질 경우 회사의 이미지와 사업 운영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사업 전환 시도와 시장의 냉정한 시선
한컴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김연수 대표 취임 이후 기존 오피스 사업에 머무르지 않고 AI·클라우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회사 측은 2025년을 ‘AI 사업의 본격적인 결실’의 해로 삼겠다고 강조한다.
일부 증권사에서는 AI 사업 성과와 주주환원정책 확대가 결합되면 기업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시장의 기대는 신중하다. 기존 오피스 소프트웨어에서 AI·클라우드로의 전환이 얼마나 실질적이고 경쟁력 있는 결과로 이어질지 아직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컴의 과제
한컴이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제품 경쟁력의 문제를 넘어선다. 오너 리스크,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력 부족, 사용자 경험 개선 지연 등 복합적 과제가 얽혀 있다. 여전히 관공서 중심의 ‘HWP 생태계’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도 장기적으로는 부담이다.
이제 한컴이 진정한 ‘국민 소프트웨어’의 자리를 되찾으려면, 국내 시장 의존을 넘어서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는 기술력과 사용자 친화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 AI·클라우드 전환이라는 선언이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성과로 이어지느냐가 향후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