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차세대 반도체 패권을 걸고 ‘빛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인공지능(AI) 칩의 성능을 가로막는 병목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기존 구리 배선 대신 광(光) 신호를 활용하는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 기술을 미래 성장 축으로 정하고 2027년까지 CPO(Co-Packaged Optics) 상용화를 공식 목표로 제시했다. 업계에서는 이 시점을 전후해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차세대 패키징 시장에서 정면 승부를 벌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AI 반도체는 연산 속도 자체보다, 칩과 칩 사이를 오가는 데이터 전송이 병목으로 지목돼 왔다. 대규모 언어모델과 초거대 AI가 등장하면서 데이터 이동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이를 담당해 온 구리 배선은 발열, 저항 손실, 전력 소모 측면에서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다. 엔비디아와 AMD 같은 주요 칩 설계사들도 더 이상 기존 구조만으로는 데이터센터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실리콘 포토닉스는 이런 한계를 정면으로 겨냥한 기술이다. 전기 신호를 레이저 빛으로 바꿔 실리콘 기판 안의 도파로를 통해 전송한 뒤, 다시 전기 신호로 되돌리는 방식으로 동작한다. 전자가 구리선을 따라 이동할 때 발생하는 저항과 발열을 피할 수 있어, 같은 면적에서 훨씬 높은 대역폭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막힌 도로 위에 새로운 고속철 선로를 까는 수준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이 기술은 2010년대 중반 인텔이 데이터센터용 광 트랜시버를 내놓으며 상용화의 문을 연 바 있지만, 당시에는 시장 반응이 제한적이었다. AI 워크로드가 지금처럼 폭증하지 않았고, 기존 전기식 인터커넥트만으로도 대부분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초거대 AI 모델의 등장 이후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과 시스템 발열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광 신호를 이용한 전송 기술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로 떠올랐다.

차세대 경쟁의 최전선에는 CPO라는 새로운 패키징 구조가 있다. 기존에는 서버 메인보드와 떨어진 위치에 광 모듈을 장착했다면, CPO는 연산 칩과 광학 부품을 같은 기판 위에 나란히 올려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개념이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CPO가 본격적으로 도입될 경우 데이터 처리량은 최대 10배까지 늘고, 전력 소비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광학 소자의 열 민감도, 멀티 칩 구조에서 발생하는 신뢰성 문제 등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현재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TSMC가 한발 앞서 있다. TSMC는 실리콘 포토닉스 전문 스타트업과 손잡고 생태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의 아이어 랩스(Ayar Labs), 설레스티얼 AI(Celestial AI), 라이트매터(Lightmatter) 등과 긴밀히 협력하며, 엔비디아 같은 대형 고객사를 중심으로 광 인터커넥트 기반 시스템을 적극 제안하는 모양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자체 행사에서 광 기반 스위치 칩을 공개하며 데이터센터 운영비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기술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략을 택했다. 핵심은 글로벌 연구개발(R&D) 네트워크를 활용해 실리콘 포토닉스를 내부 역량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삼성은 싱가포르에 위치한 연구 거점을 확장해 실리콘 포토닉스 전담 기지로 삼고, 이 조직에 TSMC 출신 전문가를 영입해 전면에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인텔에서 CPO 관련 연구를 수행해온 인력까지 합류하면서, 경쟁사 경험을 겸비한 엔지니어 그룹을 빠르게 꾸려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의 R&D 벨트는 한국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인도, 미국, 일본 등으로 이어지며, 특히 싱가포르를 광 기술 협력의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A*STAR 산하 연구기관과 실리콘 포토닉스 파운드리 업체,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장비를 공급하는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밀집해 있어 공동 연구와 시제품 개발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삼성은 이 생태계 안에서 네트워크 기업과도 손잡고 공동 개발을 진행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TSMC 진영은 이미 실물 결과물을 통해 기술 성숙도를 강조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열린 TSMC 오픈 이노베이션 포럼에서는 파트너사들이 광 인터커넥트 기반 서브시스템을 시연하며, 가속기 한 개당 100Tbps급의 대역폭을 제공할 수 있는 설계를 공개했다. 해당 시스템은 TSMC의 포토닉스 플랫폼 위에 여러 개의 칩렛을 결합하는 구조로, 프로토콜 변환, 전기 신호 처리, 광 변환 기능을 각각 분리해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HBM과 가속기 다이까지 단일 기판에 함께 통합한 레퍼런스 디자인이 제시되면서, 기술이 연구실 단계를 넘어 상용화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업계 고위 관계자들은 삼성전자가 제시한 2027년 CPO 상용화 목표를 사실상 TSMC를 정면으로 지목한 도전장으로 보고 있다. 실리콘 포토닉스가 2030년 전후에는 칩 레벨까지 통합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는 가운데, 누가 먼저 안정적인 양산 공정과 생태계를 구축하느냐가 파운드리 시장의 판도를 갈라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메모리 분야에서 HBM이 수익성과 전략 가치를 동시에 갖춘 무기로 떠올랐다면, 실리콘 포토닉스는 시스템 반도체와 패키징 영역에서 그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지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

AI 인프라 투자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지금, 삼성전자와 TSMC는 단순히 미세 공정의 선두 자리를 다투는 것을 넘어, 칩을 어떻게 연결하고 패키징할 것인가를 놓고 새로운 경쟁에 들어갔다. TSMC가 스타트업·고객사와의 연합으로 선점 효과를 키우는 전략을 택했다면, 삼성은 글로벌 R&D 거점과 인재 영입을 통해 기술을 내부화하고 한 번에 도약을 노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2027년을 두고 “빛을 지배하는 쪽이 차세대 파운드리 패권을 가져가는 원년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