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국이 관세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했지만, 실제 세부 조율 과정은 순탄치 않다. 양해각서(MOU) 문안 공개를 앞두고 반도체 관세 기준과 농산물 시장 개방 범위를 둘러싼 이견이 드러나면서, 최종 발표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협상은 끝났지만, ‘해석 싸움’은 시작됐다
미국 상무부는 “한국이 시장 전면 개방에 동의했다”고 발표했지만, 한국 정부는 “농축산물 추가 개방은 없었다”며 정면 반박했다.
정부 관계자는 “쌀·쇠고기 등 핵심 품목은 방어에 성공했다”며 “미국산 수입 물량 일부 제한은 유지된다”고 밝혔다.
즉, 미국은 ‘완전 개방’을 강조하고 한국은 ‘기존 개방 수준 유지’를 내세우는 식이다. 같은 문구를 두고 각자 유리한 해석을 내놓는 셈이다.
이는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둔 정치적 의도와, 국내 농가의 민심을 의식한 방어 전략이 맞부딪친 결과로 보인다.
▲반도체 관세, 7월 합의보다 후퇴 논란
이번 협상의 가장 큰 쟁점은 반도체 관세 기준 변경이다.
7월 첫 번째 합의에서는 한국 반도체가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보장받는 최혜국대우(MFN) 원칙이 명시됐다.
하지만 이번 MOU에서는 ‘대만 수준으로 맞춘다’는 문구가 등장하며 논란이 커졌다.
대만이 비교 기준이 될 경우, 유럽산 반도체(관세율 15%)보다 불리한 조건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산업계에서는 “‘대만 기준’이 명문화될 경우, 향후 AI 반도체나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출 시 수익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정부는 “대만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국 수준의 입지를 확보한 것”이라며, 오히려 불확실성을 줄였다고 강조했다.
▲3,500억달러 투자 패키지, ‘간판은 화려하나 내용은 미완’
이번 협상의 또 다른 핵심은 트럼프 행정부가 밝힌 3,500억달러(약 47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이다.
이 중 1,500억달러는 조선업 협력, 나머지 2,000억달러는 LNG, 광물개발, AI·양자컴퓨팅 등 미국 내 인프라 투자로 책정됐다.
문제는 세부 구조다. 투자 대상, 배분 비율, 수익 회수 방식 등이 불명확한 상태다.
한국 정부는 “투자 프로젝트 선정 시 ‘상업적 합리성’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미국 측이 구체적 프로젝트까지 선제적으로 지정하면서 실질적인 협상력 약화 우려도 제기된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한·일 동시 참여 예상
양국이 관심을 보이는 알래스카 LNG 개발사업은 북극권 노스슬로프 지역에서 천연가스를 추출해,
1,300km 길이의 파이프라인을 따라 니키스키 항까지 수송한 뒤 액화하는 대형 프로젝트다.
총 사업비는 약 450억달러로 추산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모두를 주요 파트너로 지목했으며,
한국은 모펀드-자펀드 구조로 투자하고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투자협의위원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
이는 프로젝트 제안권을 확보한 셈이지만, 최종 승인권은 여전히 미국 측이 가진다.
반면 일본은 프로젝트별로 SPV(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해 참여한다.
이 방식은 손실 프로젝트의 위험을 다른 사업 이익으로 상계할 수 없어, 리스크 관리 면에서는 한국이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동맹 금융’의 새 프레임…에너지·광물·AI까지 확장
미국은 이번 협상을 계기로 단순 무역이 아닌 ‘전략산업 공동투자 동맹’ 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특히 조선, 핵심광물, 에너지 인프라, AI 반도체 등은 중국 견제와 공급망 안보 확보라는 공통 목표 아래 묶여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조선·에너지·AI 산업의 기술력을 지렛대로, 대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세부 투자 조건이 미국 중심으로 설정될 경우, 국내 기업의 실익 확보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외교의 문장보다 중요한 ‘계약의 숫자’
결국 이번 협상의 성패는 외교적 수사보다 MOU 문구가 실제 계약과 자금 흐름으로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 관세 조항, 농산물 개방 범위, 투자 거버넌스 등은 향후 공개될 부속 문서에서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한 외교 전문가는 “이번 협상은 정치적 타결의 ‘1막’일 뿐, 산업계 입장에서는 진짜 시작은 세부 조항이 확정되는 ‘2막’부터”라며
“특히 반도체와 에너지 분야는 향후 한미 경제 협력의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